IT 번역과 게임 번역은 무엇이 다른가
Written by 달달한짬뽕
“게임 번역? IT 번역? 뭐가 다른거지? 그냥 다 한글에서 영어로 번역하든, 아니면 영어에서 한글로 번역하면 되는 거 아냐?”
…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다면 한 80%는 맞고 20%는 틀렸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거의 대부분은 맞지만 약간씩 다른 부분이 있다고 이해하시면 좋을 것 같네요. 그럼 이제부터 무엇이 비슷하고 무엇이 다른지 살펴보겠습니다.
참고: 대부분의 IT 소프트웨어는 처음부터 영어로 개발되거나 [영어 + 개발자의 모국어]로 개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용자층을 감안한다면 자연스러운 결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국내 IT 소프트웨어 번역 작업은 영어를 기본으로 한 한국어 번역이 주를 이룹니다. 그래서 이번 시간에는 IT 소프트웨어와 게임 소프트웨어 모두 영어 -> 한국어로 번역하는 경우만을 기준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번역 내용
번역 내용의 난이도로 볼 때 IT 소프트웨어의 난이도가 낮은 것은 절대 아닙니다. IT와 관련된 전문 지식을 보유하고 새로운 제품에 대해 탐구하는 자세를 가져야 좋은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아주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CAT Tool(Computer Assisted Translation Tool)에 대한 사용 능력을 갖춰야 하는 것은 기본 중에 기본입니다.
하지만 IT 소프트웨어는 제품의 특성상 새로운 제품이 출시된다고 해서 기존 기능을 모두 다 없애고 새로운 기능만 잔뜩 추가해서 출시되는 경우가 없습니다. 대부분 기존 기능을 유지하면서 새로운 기능을 추가하거나 기존 기능을 보완하는 형태로 제품 출시가 이루어지죠. IT 소프트웨어는 대표적으로 이미 오래 전부터 꾸준하게 한글 제품을 출시하고 있는 Microsoft의 Office 제품군과 Windows 제품군을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두 제품군 모두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많은 버전의 신제품을 만들어 왔습니다. 그리고 제품이 나올 때마다 한글 번역 작업을 했죠. 처음 번역을 시작할 때는 당연히 모두 새롭게 번역을 했겠지만, 이후 출시되는 버전은 어떻게 했을까요? 아마도 새로 추가되는 내용은 번역하지만 기존과 동일한 내용일 때는 그대로 기존 번역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리고 이후 새로운 제품이 나와도 거의 비슷한 방식으로 번역을 진행했을 겁니다.
이렇게 번역을 진행하면 좋은 점이 있습니다. 새로 번역해야 할 내용이 생겨도 참고할 수 있는 기존 번역이 있다는 것입니다. 즉, 어조(tone)와 어투(manner)를 참고하여 기존과 유사한 번역 진행이 가능해지는 것이죠. 그리고 변경되지 않는 기존 번역은 CAT Tool을 이용해서 그대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위에 말씀드린 것처럼 IT 번역은 기존 번역(우리는 레거시(legacy)라고 부릅니다)을 계속해서 참고하여 기존과 동일한 어조와 어투를 사용하기 때문에 이 부분에 대해서는 번역사가 추가로 학습하거나, 검토할 필요가 아예 없거나 거의 없어집니다. IT 번역 경험을 가진 번역사라면 신제품이 출시되고 내용이 많이 바뀌더라도 큰 어려움 없이 번역을 수행할 수 있는 상황이 펼쳐지는 겁니다. 즉, IT 번역은 일반화, 규격화되어 있어서 새로운 제품 번역을 진행하더라도 새로 습득해야 할 배경 지식이 적습니다.
그렇다면 게임은 어떨까요?
게임은 기본적으로 즐기기 위해 만들어지는 소프트웨어입니다. 내용의 신선함을 유지하는 것이 숙명처럼 따라오는 콘텐츠이죠. 그러다 보니 모든 게임이 다 각자의 독특한 세계관과 배경을 지니고 있습니다. 덕분에 신조어가 등장하는 경우도 잦고 게임 내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로 인해 다수의 어투를 사용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게임 콘텐츠의 상대적인 난이도를 올리는 가장 큰 부분은 IT 번역처럼 레거시(legacy)를 활용할 수 있는 범위가 넓지 않다는 것입니다. 동일한 게임의 차기 버전(예: Witcher 1, Witcher 2, Witcher 3 등)이 나올 때는 기존 번역을 통해 참고할 내용이 많지만 그 외에는 활용도가 거의 전무(全無)한 수준입니다.
또한 게임의 내용을 번역하다 보면 무한한 상상력이 필요할 때가 많습니다. 창작 능력과 함께 번역하는 언어의 문화나 분위기에 맞게 새롭게 창조하는 Rewriting 능력이 필요하기도 합니다.
하루 처리 가능 분량(번역사 기준)
IT 소프트웨어의 경우 2,500 ~ 3,000단어를 하루(8시간 기준)에 번역합니다. 이것은 개인의 능력차에 따라 편차가 많이 발생할 수 있는 부분이므로 평균치 정도로만 생각해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게임 소프트웨어의 경우 하루 평균 1,500 ~ 2,000단어 정도를 번역할 수 있습니다. 물론 게임 번역도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 익숙해지면 하루 2,000 ~ 2,500단어 정도는 번역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까다로운 부분이 많아 IT 소프트웨어 번역사만큼 속도를 내기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번역사의 수
번역사의 수를 볼 때도 게임 전문 번역사보다는 IT 전문 번역사가 훨씬 많습니다. IT 전문 번역사의 수를 100으로 볼 때, 게임 전문 번역사는 약 30~40 정도로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이렇게 비율 면에서 큰 차이가 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게임 번역이 상대적으로 난이도가 높다고 해서 번역사에게 번역료를 더 주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IT 번역과 비슷하거나 약간 높은 수준의 번역료를 받으면서 게임 번역에 자신의 시간을 투자할 번역사는 많지 않습니다.
TM 활용도
TM(Translation Memory) 활용도는 당연히 IT 소프트웨어 진영이 훨씬 높습니다. IT 소프트웨어는 한번 TM을 만들어 놓으면 다음 버전 또는 유사한 다른 제품군에서도 활용이 가능하지만 게임 소프트웨어는 동일 제품군의 차기 제품에서도 활용도가 현저히 감소합니다.
예를 들어, 2020년에 제작된 Office 프로그램을 번역하면서 만들어진 TM을 활용해서 2021년에 새로 제작된 신규 Office 프로그램을 번역한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이때, 대부분의 기능은 그대로 유지되고 새로 개발된 일부 기능(전체에 비하면 “일부”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추가될 것이기 때문에 기존 기능에서 사용한 번역은 거의 대부분 TM을 통해 그대로 활용해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TM에 있는 내용을 그대로 복사해서 사용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비율로 표현하자면 최소 50%에서 많게는 80% 가까이 기존 번역 내용을 재활용(?)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게임에서의 TM 활용은 어떨까요? 오래도록 게이머들의 사랑을 받으며 후속작을 내고 있는 어쌔신 크리드(Assassin’s Creed)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어쌔신 크리드 1편의 번역 텍스트를 TM으로 변환하여 저장해 두었다고 가정할 때, 어쌔신 크리드 2편에서 활용할 수 있는 TM의 내용은 기본적인 공통 용어(Glossary 또는 Term), 시스템 메시지, 주요 인물들의 어투 정도일 것입니다. 게임은 일반 소프트웨어와 달리 후속작이 출시되더라도 내용이 전작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똑같은 내용의 후속작을 다시 플레이하고 싶은 게이머는 거의 없을테니까요. 다만, 게임 번역에서도 용어 및 문장의 일관성 유지(때로는 이것 자체가 맹점이 되기도 하지만)는 상당히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TM을 활용하는 것이 필수이긴 합니다.
LSP 수
LSP는 Language Service Provider의 약자입니다. 한마디로 번역 업체를 말하는 건데요. 게임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LSP는 IT 소프트웨어를 다루는 업체에 비해 그 수가 상당히 적습니다. 간단히 말해 거의 모든 LSP가 IT 번역을 다루고, 그 중 절반 정도는 게임 번역을 병행해서 다룹니다. 게임만 전문적으로 다루는 LSP는 그 중에서도 극히 일부입니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앞서 언급했던 각 분야별 번역사의 수와도 일맥상통합니다. 게임 번역이라고 해서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하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에 대부분의 LSP는 난이도 대비 낮은 수익률로 운영해야 하는 게임 번역 서비스를 기피하게 되는 것이죠.
지금까지 언급한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 표와 같습니다.
항목 | IT 소프트웨어 | 게임 소프트웨어 |
---|---|---|
내용 | 일반화 및 규격화되어 있음 | 각 게임별로 상이함 |
번역 스킬 | 상대적으로 낮음 | 높음(창작 능력, Rewriting 능력 필요) |
생산성(1일: 8시간) | 2,500 ~ 3,000 단어 | 1,500 ~ 2,000 단어 |
번역사 수 | 많음(대부분의 번역사) | 적음(게임 전문 번역사) |
TM 활용 | 가능 | 부분적으로 가능 |
LSP 수 | 대부분의 LSP가 해당됨 | 게임 전문 LSP는 상대적으로 적음 |
위에 정리해 드린 것처럼 게임 소프트웨어 번역은 기술 번역 분야에서도 상당히 독보적인 존재감을 드러내는 분야 중 하나입니다. 일반적인 기준에서 항상 조금씩 무언가를 더 준비해야 하는 분야이지만 이 분야에서 고군분투하고 계신 대부분의 번역사님들과 관계자분들(Project Manager, Language Manger 등)은 무척 즐겁게 일하고 있다는 점도 특이합니다. 우리가 다루고 있는 이것, 바로 게임에 대한 애정이 없다면 아마도 불가능한 일이겠죠.
지금까지 전 세계 모든 게이머들이 언어 장벽 없이 게임을 즐기는 세상을 꿈꾸는 통풍47호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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