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과 결과
Written by Nujabes
8~90년대에 유년기를 보냈던 사람이라면 소위 ‘게임북’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게임북이 무엇이냐, 바로 어떤 스토리를 중심으로 독자에게 여러 선택지를 주어 선택에 따라 ‘XX페이지로 가시오’와 같은 지령을 줘서 결국 마지막 페이지까지 도착하도록 유도하는, 뭐 원시적인 오락물이었다. 이것이 디지털화된 것이 바로 어드벤처 게임이다. 초창기에는 메모리와 코딩 등, 기술적인 제한으로 온전히 담아내지는 못했지만.
그러나 대략 2010년대 초반부터 게임북은 새로운 모습과 개념으로 재탄생한다. 바로 ‘선택과 결과’라는 트렌드로 말이다. 말 그대로, 게임을 진행하며 플레이어가 내린 선택이 게임의 줄거리와 플레이, 마침내 결과에까지 반영된다는 것이다. ‘텔테일 게임즈’(Telltale Games)가 이 분야에서 선구자 역할을 했으며(비록 지금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으며, ‘~는 이 일을 기억할 것입니다’는 일종의 조롱에 가까운 밈으로만 남았지만 말이다) 옵시디언 엔터테인먼트(Obsidian Entertainment)는 역사적인 RPG 게임, 폴아웃: 뉴 베가스(Fallout: New Vegas)로 플레이어의 선택이 어떻게 세계를 바꿔 놓을 수 있는지를 증명했으며, 그 과정에서 수많은 상호작용과 대사로 완벽한 세상을 묘사해냈다. 라리안 스튜디오(Larian Studio)의 디비니티: 오리지널 신 2(Divinity: Original Sin 2)는 주인공의 선택을 도덕적 딜레마와 접목시키고, 서로 반목하는 이해 관계를 고전적이면서도 현대에 맞게 새롭게 재해석된 아이소메트릭 RPG로 빚어냈다. 이 외에도 수많은 게임이 일종의 극의에 다다르기 위해 노력했으나 모든 게임이 성공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저 겉핥기 식으로만 대충 넣어 둔 게임도 있었고(겟 이븐; Get even) 야심찬 시도에 비해 용두사미로 빠진 게임도 있었다(티러니; Tyranny). 그 모든 시도와 노력이 어떤 결과를 낳았든 간에, 이 선택과 결과를 로컬라이제이션 관점에서 살펴보자.
게임 로컬라이제이션은 결코 수월한 일이 아니다. 수많은 등장인물이 있으며, 수많은 아이템과 스킬이 있으며, 수많은 지명과 대사와 관계가 나타난다. 물론 게임을 직접 플레이하며 인물 간의 관계와 전체 스토리를 속속들이 꿰뚫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안타깝지만 실제 작업은 따로 정리된 레퍼런스를 보며 진행되는 일이 대부분이고, 실제 게임을 플레이할 시간은 대체로 모자라다.
자, 이때 모던 워페어류의 롤러코스터식 일직선 FPS 게임과, 챕터 1에서 내렸던 선택이 수십 개의 분기를 거쳐 챕터 10에서 깜짝 재등장하는 RPG가 있다고 치자. 전자의 경우 모든 게임에서 공통적인 요소(지명, 인명, 아이템명, 스킬명 등등)를 제외하고 머리에 넣어 두어야 할 것만 떠올려 보면 다음과 같다.
FPS: 인물 간의 관계(반말이냐 존댓말이냐), 반전(있다면).
반면 수십 수백 개의 분기가 있는 RPG는 극단적인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RPG: 선택 1 – 선택 1에서 새롭게 추가되는 4가지의 선택지 – 선택 1에서 추가된 4가지의 선택지에서 각각 개별적으로 추가되는 4가지의 선택지
대충만 계산해도 벌써 16개다.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의 수많은 분기
예로 들었던 RPG는 아니지만, 가장 좋은 예로(아마 필자의 생각에 ‘선택과 결과’라는 개념을 가장 잘 구현한 게임 중의 하나인)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Detroit: Become Human)을 들 수 있겠다. 엔딩만 해도 40개가 넘고, 선택지만 해도 수백 개가 넘으며, 챕터 1에서 했던 사소한 선택은 챕터 12에서 예상치 못하게 튀어나와 주인공과 스토리 전체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주기도 한다. 이 많은 내용을 머리에 넣고 작중 가장 중요한 (스포일러)의 정체가 밝혀지고 나면 급하게 ‘그때 그 대사가 이런 뜻이었나?’하고 작업분을 한참 전으로 돌아가 수정해야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가장 좋은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직접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이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그럴 시간은 모자란 경우가 태반이다. 차선은 레퍼런스를 철저히 익히고, 전체 스토리에 관해 서술한 문서를 받아 항상 염두에 두며 작업하는 것이다. 이 경우 스포일러는 피하기 힘들겠지만. 간단하게 (별도로 제공되지 않는 경우) 회로도를 그려 보는 것이 좋겠다.
그러나 가장 좋은 것은 역시 전용 툴을 사용하는 것이다. 얼마 전 뛰어난 품질로 유저 한글화가 완료된 ‘디스코 엘리시움’(Disco Elysium)에서는 실시간으로 선택에서 이어지는, 일종의 머드 게임Mud Game과 같은 툴을 사용했다고 한다. (기사 참조: https://www.thisisgame.com/webzine/nboard/5/?n=108603)
그래픽이 지원되지 않는 원시적인 텍스트 어드벤처가 툴이 된 것이다. 이 경우 전체적인 흐름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세세한 부분에 집중할 수 있는 좋은 수단이 아닐까 싶다.
앞으로 ‘선택과 집중’의 게임은 점차 늘어날 것이다. 그것보다 나은 몰입을 제공해 줄 수 있는 게임의 문법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게임 링기스트의 전체적인 시야와 툴의 적극적 개발(위 기사에서도 나와 있듯 디스코 엘리시움에 사용된 툴은 자체 제작 툴이다)이 필요하다고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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