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저 한글화의 암과 명
출처: 사이버펑크 2077 공식 유튜브 채널
Written by Nujabes
자본주의 사회의 다른 모든 상품과 마찬가지로, 게임 또한 재화의 일종으로 수요와 공급의 법칙이 적용되며 시장성이 없다면 제작-유통-판매의 과정도 거치지 않는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의 다른 모든 상품과 마찬가지로 게임에는 소비자의 취향 또한 반영된다. 오히려 그 어떤 상품보다도 많은 취향이 반영된다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논란이야 있겠지만 게임이야말로 예술의 종착점이고, 예술은 본디 취향의 영역에 놓여 있기 때문에. 그러나 이러한 예술적 속성을 고려하더라도 게임은 앞서 말한 대로 상품이다. 팔아야 하는 것이다. 소수의 매니아층이 있다고 해서 제작사와 유통사의 수익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자, 이런 역경을 지나 게임이 발매되었다 치자. 보다 많은 소비자에게 판매되어 수익을 극대화하는 것이야말로 제작사와 유통사의 목표일 것이다. 손익 계산을 곰곰이 따져 보자. 동방의 한국이라는 나라가 있다. 시장 규모도 확실하지 않다. 예상 판매량도 가늠이 되지 않는다. 리스크를 고려하더라도 우리 게임을 사랑해 주는 한국의 게이머들을 위해 비용을 들여 한글화를 진행해야 할까?
안타깝지만 지금까지의 상황을, 최소한 몇 년 전만 해도 답은 ‘아니다’였다. 소니가 전면적이고 한글화를 진행한 것은 당시 불모지와도 같았던 한국 콘솔 시장에서 카와우치 대표의 ‘결단’이 큰 영향을 끼쳤다고 알려져 있을 정도로 위험한(?) 시도였고, 대다수의 AAA 게임도 유통사에서 독점으로 판매한 카피에 대해서만 한글 패치가 제공되었으며(리스크를 최소화하기 위해), 몇몇 대규모 회사를 제외하고는(예: 블리자드) 한국이라는 시장은 그렇게까지 매력적인 시장은 아니었던 것이다. 베데스다의 역작, 엘더스크롤: 5 스카이림만 해도 그렇다. 국내에서 대략 10만장이라는 판매고를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확신이 없었던 탓일까.
유저 한글화의 대표적인 국내 그룹, 팀 왈도
이러한 상황에서 게임을 즐기고 사랑하는 국내 게이머들은 전적으로 ‘유저 한글화’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돈 한푼 받지 않고서, 그저 순수한 열정과 애정, 그리고 봉사 정신에 힘입은 몇몇 게이머들은 아무런 지원도 툴도 참조할 자료도 없이 그저 게임 그 자체만을 플레이하며 번역을 진행했고 자체 검수까지 실시했다. 폴아웃 4(98만 워드), 위처 3(45만 워드), 디스코 엘리시움(98만 워드) 등이 좋은 예이다. 널리 인간, 아니 게이머를 이롭게 하라는 홍익인간의 정신이 느껴지지 않는가?
그러나 안타깝게도 유저 한글화에는 좋은 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품질 문제가 심각하다. 위처 3는 지금은 그래도 검수를 거쳤지만 빈말로라도 좋은 수준은 못 됐고, 폴아웃: 뉴 베가스는 심각한 수준이었다. 고등학생 시절, 필자는 분노에 차 나무위키의 폴아웃: 뉴 베가스/오역 문서에 매일같이 오역을 추가하곤 했다(70% 정도는 필자가 채웠을 것이다). 술집의 바와 감옥의 쇠창살을 헷갈리지 않나, 총이나 한 방 쏴 주라는 것을 사진이나 한 방 찍고 오라고 번역하질 않나. 어찌 보면 당연한 현상이다. 게임을 사랑한다고 해서 언어 실력도 그에 비례하는 것은 아니고, 수많은 작업자가 참여하다 보니 집단 지성과 빠른 작업이 가능하다는 장점은 있지만 전체적인 감수자의 부재로 일관성이 심각하게 떨어질 수밖에 없는 일이니까. 게다가 시간과 비용 문제도 있다. 어쨌든 전문 번역가는 노동에 대한 대가를 받고 책임감을 가지고 진행하지만, 유저 한글화는 오직 개인의 이타심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언제든 손 털고 떠나갈 수 있다는 말이다.
자, 그렇다면 유저 한글화에 단점만 있는 것일까. 물론 아니다. 앞서 말한 홍익인간 정신도 물론 그렇지만, 활발한 유저 한글화는 고무적인 결과를 여럿 낳았다. 유저 한글패치가 공식 한글패치로 제작사에 의해 인정받는 사례가 특히 그렇다(디비니티: 오리지널 신 2, 디스코 엘리시움 등). 그중에서도 개인적으로 가장 감동했던 사례는 바로 위처 3의 유저 한글패치가 CDPR의 환영을 받아 공식 한글패치로 지정된 것으로, 이는 다가오는 12월, 사이버펑크 2077의 전면 공식 한글화는 물론 풀 한국어 더빙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여기에서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바로 제작사들이 한국 시장을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앞서 언급한, 한글화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던 메이저 게임 제작사(이자 유통사)인 베데스다가 2017년 이블 위딘 2를 시작으로 폴아웃 76, 울펜슈타인 및 둠 이터널의 공식 한글화를 진행한 것이 좋은 사례라고 본다. 그야말로 선순환이다. 아무리 게임이 유명하고 잘 만들었다고 해도 언어의 장벽은 대단하다. 적극적이고 전문적인 한글화는 더 많은 국내 게이머를 유도할 것이고, 자연스레 게임 시장의 규모도 커질 것이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전문적인 실력은 물론 게임에 대한 열정과 전문적인 지식을 갖춘 링기스트의 확보가 필수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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