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어볼? 화염구? 디아블로의 추억

 Written by Nujabes




필자가 디아블로2를 처음 접한 것은 군대에서였는데, 적절한 오락거리가 없던 그 시절 병사들이 이용할 수 있던 조그마한 PC방은 그야말로 고된 생활의 활력소였다. 설치되어 있던 게임이라고는 디아블로2, 스타크래프트와 같이 조금 연식이 있는 게임들이었지만. 해서 디아블로2를 잠깐 플레이했다가(드루이드) 금방 스타크래프트로 복귀하고 말았다. 우선 용어부터가 너무 생소했기 때문이다. 라흡? 바바양복? 샤에이글? 올레?

물론 어떤 게임이든(비단 게임뿐만은 아니지만) 은어의 사용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플레이어들 사이의 결속력 생성에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나중에 우연히 떠올라 다시 찾아본 저 용어들은, 글쎄, 그래도 너무 비직관적이지 않은가. 라흡(라이프 흡수)은 심지어 영어와 한국어의 합성어다.

이후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다시 접한 디아블로3는 그야말로 신선했다. 풀 더빙은 물론이요, 사소한 아이템이나 등장인물의 이름, 일지 항목까지 100% 번역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단순한 1:1 번역이 아닌, 고유명사까지도 공들여 옮긴로컬라이제이션 말이다.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고, 보다 자연스러우며 또 친근하다.

1막에서 5막에 이르는 장대한 여정에서, 거대한 우두머리에서 수없이 쏟아지는 벌레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네팔렘은 수많은 적들을 썰고 베며 해치워야 한다. 이러한 적들을 상대하다 보면 이름에 눈이 가기 마련인데, 게임을 플레이하면서도 필자는 ?’…’ 사이에서 수없이 흔들리곤 했다. ‘?’과연 이게 최선이었나? 너무 어색하지 않나?’의 의미요, ‘…’그래, 저기서 뭘 어떻게 더 바꾸겠어?’번역가가 고생 엄청 했겠구나의 의미다. , 몰락자라는 종족을 살펴보자. 저명한 학자 압드 알하지르의 말에 따르면 원래는 악마였으나 아즈모단이 대악마들과 싸울 적에 줄을 잘못 서서 벌로 지금과 같이 초라한 모습이 되었다고 한다. 원문은 ‘Fallen’으로, 추락한 것들, 타락한 것들, 대략 이런 의미를 갖고 있다 보면 되겠다. 그런데 몰락자라니? 몰락+자者의 구성으로 얼핏 보면 잘 와닿지 않고 어색한 느낌을 준다(필자도 처음에 그런 느낌을 받았다). 고려대한국어대사전에서는 자의 쓰임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접미사

1) 학문이나 전문적인 영역을 나타내는 일부 명사 뒤에 붙어, ‘그 방면의 일이나 지식에 능통하여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의 뜻을 더하여 명사를 만드는 말.

2) 일부 명사 뒤에 붙어, ‘그러한 일이나 역할을 하는 사람의 뜻을 더하여 명사를 만드는 말.

3) 자연과 관련된 일부 명사 뒤에 붙어 그러한 일이나 역할을 하는 생물의 뜻을 더하여 명사를 만드는 말.

4) 일부 명사 뒤에 붙어 그러한 성질이나 상태에 있는 대상의 뜻을 더하여 명사를 만드는 말.


그렇다면 이 경우 4번의 용례로 사용되었다고 보면 되겠다. 좋다, 첫 번째 ?’…’으로 바뀌었다. 그렇다면 밤의 울음꾼’(Night Howler)? ? 사기꾼? 낚시꾼? 그렇게 좋은 의미로 쓰이지는 않는 것 같다. 그러나 소리꾼이라는 말을 보았을 때, 울음꾼도 넘어갈 수 있다. 그 외에도 많은 의아한 순간들이 있었다. 기괴살덩이라든가, 영혼 울림귀라든가, 영혼 갈취자라든가. , , , . 업계인으로서 고민하고 의아해하다 보니 어느덧 필자의 캐릭터는 디아블로를 쓰러트려 세상을 구하고야 말았다. 그렇다고 고민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왜 왠지 모를 어색함을 우리는 느끼는가?

나름대로 정리해본 결론은 이렇다. 첫째, 우리는 그동안 게임 현지화 불모지에서 살아 왔고, 둘째, 현지화는 촌스럽다고 생각한다(오로지 개인적인 의견이다).

블리자드는 번역 과정에서 적절한 현지화를 방침으로 삼고 있다. 이러한 기조는 지금에 와서는 당연하다고 여겨지지만, 스타크래프트 2가 처음 나왔을 때만 해도 엄청난 반대 의견이 있었다. 어색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제는 거의 민속놀이의 위상을 지닌 스타1이나 디아2만 하더라도 마린이니 질럿이니 하는 용어가 훨씬 더 익숙하지, 해병이나 광전사는 아무래도 새롭고 또 입에 붙지 않았던 것이다. 같은 시절, 양판소(양산형 판타지 소설)에서는 그저 멋있다는 이유로 화염구 대신 파이어볼이라는 용어를 고수했고, 심지어 국산 게임에서도 그랬다. 배경이 서양이라는 이유로(반대급부로 동양적 세계관을 가진 게임은 MP가 아닌 내공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는 것이 대단한 마케팅 포인트가 되곤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럴 이유가 없는데도 말이다. 해당하는 번역어가 엄연히 존재하는 상황에서. 모든 말은 옮길 수 있다. 출발 언어의 의미를 100% 전달하지 못하고, 어딘가 찜찜한 어색함이 남는다 해도 말이다. 이를 위해 노력하고 끊임없이 고민하는 것이야말로 번역과 현지화의 궁극적인 목표요, 자국어를 향한 애정과 관심을 환기시키는 길이 아닐까?

블리자드가 닦았던 길은 어느덧 넓어져 최근 들어서는 보다 치열하고 적극적인 현지화가 이루어지고 있지 않나 싶다. 더빙도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것은 물론이다. 한 사람의 게이머이자 번역 업계에서 종사하는 필자에게 반가운 일이자, 보다 깊은 한국어 공부와 너른 어휘가 필요하다고 느끼는 계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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