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라는 말에 관해서 – 게임 속 인칭대명사의 사용


Written by Nujabes


한국어의 특징 중 하나는 주어의 쓰임에서 극명히 드러난다. 어떤 특징이냐고? 잘 안 쓴다는 것이다. 영어를 비롯한 서양어(굉장히 모호한 기준이기는 하지만)에서는 주어의 중요성이 두드러진다. 의무교육 과정에서 1형식, 2형식이니 외웠던 것을 떠올려 보자. S, 즉 주어는 결코 빠지지 않는다. 반면 한국어에서는 주어를 생략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또한 권장된다. ‘사랑해, 밥 먹었니’와 같은 일상에서도 자주 쓸법한 문장들을 떠올려 보자. 영어로 옮기면 각각 ‘I love you, Did you eat’이 된다. 법전이나 계약서와 같이 행동의 주체를 명시해야 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우리 한국어 화자는 굳이 문장의 주인이 누구인지, 듣는 이가 누구인지 나타나 있지 않아도 동사의 쓰임이나 문맥에서 파악하고 마는 것이다. 그렇기에 ‘자연스러운’ 번역에서는 You를 마케팅이든 IT든 상관없이 피하는 경우가 잦다. ‘너는 너의 개를 산책시킨 뒤 너의 집으로 돌아가 네 부모님과 함께 저녁을 먹었어.’ 끔찍한 문장이다.

그러나 필연적으로 주어는 어느 때고 숨을 죽이고 있다가 당신을 괴롭힌다. 블로그의 주제에 맞게 게임을 예로 들어 보자. 일지에서 플레이어는 지난 여정을 돌이켜 본다. ‘사악한 고블린 무리를 무찔렀다. 토벌대의 대장 아무개는 왕국의 증표를 건네며, 증표를 서쪽의 주술사에게 가져가라 했다. 서둘러 높새바람 탑으로 떠나야 한다.’ 흔한 문장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러나 이를 영어로 옮긴다고 했을 때 화자를, 주어를 누구로 설정해야 하느냐가 문제가 된다. I must? You must?


1)

게임을 왜 하는가? 많은 답이 있겠지만, 다른 모든 예술 작품과 마찬가지로 게임은 새로운 세계로 여러분을 초대한다. 그곳에서 여러분은 새로운 인물로 다시 태어나 지금껏 접해 본 적 없는 세상을 탐험하고 여러분만의 이야기를 써내려 간다. 이때 가장 적합한 인칭은 무엇일까? 필자는 단연코 1인칭이라고 생각한다. 힘겨운 싸움을 끝내고, 멋진 경치를 내려다보며 일지를 폈을 때 플레이어-캐릭터 간의 경계는 모호해지고, 당신은 ‘내’가 되어 이야기를 기록한다. 


<단순히 ‘드래곤본’이라는 설정만이 주어져 있으며, 외관, 행보, 업적, 선택마저도 플레이어의 손에 맡겨 자신만의 서사를 구축하게끔 유도하는 오픈 월드 RPG, 스카이림에서는 플레이어가 곧 주인공, 즉 ‘I’다.>


‘나’는 주로 강한 몰입을 의도하는 게임에서 택하는 1인칭 대명사다. 오픈 월드 RPG(가장 대표적인 예가 바로 베데스다의 엘더 스크롤 5: 스카이림이다)나 크래프팅 생존 게임, 캐릭터를 커스터마이징할 수 있는 게임에서 주로 사용된다. 논점에서는 살짝 벗어난 예외적인 이야기로, 별개의 캐릭터가 일지나 저널을 남기는 어드벤처 게임에서도 ‘I’가 주로 사용된다(이 경우 플레이어는 등장인물에 몰입보다는 ‘이입’하게 된다). 


2) 당신

대부분의 RPG 게임은 파헤쳐 보면 원시 고대에 유행했던 테이블탑 RPG(줄여서 TRPG)에 뿌리를 두고 있다. TRPG 게임에서는 플레이어들의 상상력과 스토리텔링 능력이 가장 중요한데, 이를 원활히 하며 보조하는 이가 바로 ‘게임 마스터(줄여서 GM)’이다. 적절한 세계를 세우고, 그 세계로 플레이어, 즉 ‘당신’을 초대한다. 잠깐 열심히 게임 중인 한 테이블을 보자. ‘당신은 잠긴 문 앞에 도착했습니다. 주사위를 굴려 기교를 시험하겠습니까?’ 여기서 당신은 누구인가? 당연히 게임 마스터와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는 플레이어다. 게임 마스터는 진행자이자 관찰자이며, 길잡이 역할을 한다. 필연적으로 말을 건네는 존재다.

이러한 전통은 현대의 RPG는 물론 인디게임에서도 이어졌다. 라리안 스튜디오에서 제작한 턴제 RPG, 디비니티: 오리지널 신 2(Divinity: Original Sin)에서는 등장인물과는 별개로 게임 마스터의 존재가 나타나 상황을 서술하고, 게임을 진행하며 질문을 던진다. 플레이어 – 게임 내 캐릭터를 중재하고 더 깊은 몰입을 돕는 것이다. 앞서 말한 전통과 가장 근접하다고 볼 수 있겠다.

<메타픽션은 아니나, 플레이어와 등장인물의 차이 및 거리를 명확하게 인지하며 플레이어에게 직접 말을 거는 디비니티: 오리지널 신 2>


한편 Galactic Cafe에서 제작한 2013년(HD 리메이크판 기준) 게임, 스탠리 패러블(The Stanley Parable)에서 You는 보다 깊은 의미를 가진다. 게임 내 화자, 즉 당신을 당신이라고 부르는 화자는 게임 속 캐릭터가 아닌 ‘당신’, 즉 플레이어의 존재를 인식한다. 메타픽션적이고 철학적인 질문, 즉 게임이란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고찰한 이 게임에서 2인칭 대명사의 쓰임은 일종의 ‘괴리’와 ‘소격 효과’를 의도했다고 보면 되겠다. 이와 비슷한 맥락으로 토비 폭스의 언더테일(Undertale)이 있으나, 자세히 이야기하면 스포일러가 되므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3) 제3의 존재

나도, 당신도 아닌 제3의 대명사를 활용하는 경우도 있다. 주인공은 이미 확립된 배경을 갖고 있는, 플레이어가 아닌 독립적인 등장인물이다. 이 경우 주인공 캐릭터는 ‘제다이, 재의 귀인, 크레토스’ 등으로 불린다. 저널에도 마찬가지다. 플레이어는 등장인물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그의 모험을 따라가며 관찰하게 된다. 


결국 정리하자면 호칭은 플레이어와 등장인물 간의 관계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나뉜다. 몰입이느냐, 이입이느냐, 관찰이느냐. 자, 그렇다면 실제 게임에서는 어떻게 활용될까? 이를 논의하기 위해서는 게임의 어떤 부분에서 인칭 대명사가 활용되는지를 우선 살펴봐야겠다. 먼저 등장인물의 발자취를 되짚어보고 다음 행선지를 제시하는 ‘퀘스트’가 있겠다. 다음으로는 UI다. 아이템의 효과나 스킬의 효과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을 예로 들 수 있는데, ‘섭취 시 체력을 10 회복한다’와 같이 비교적 간단한 문장은 ‘Restores HP by 10 upon consumption’과 같이 가주어 ‘It’을 쓸 수도 있겠지만, ‘사용 시 높게 뛰어올라 적을 공격한다’와 같은 문장에서는 누가 뛰어오른다는 것인지 알고 있더라도 문장에는 밝혀 주어야 한다.

사족이 너무 길었다.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써야 할까?

많은 게임에서는, 의도적으로 플롯상에서 메타픽션적 요소를 꾀한다거나 하는 경우를 제외한다면 인칭대명사를 복합적으로 사용한다. 플레이어가 주인공에게 깊게 몰입/이입하기를 바란다면, 그러한 서사와 배경을 확립하고 동기를 부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일지나 퀘스트에서는 ‘I’를 사용할 수도 있다. 한편 보다 객관적인 정보, 즉 스킬의 효과나 아이템의 능력치에 관한 정보를 전달할 때에는 그러한 정보를 받아들이고 판단해야 하는 플레이어에게 직접적으로 말을 거는 ‘You’를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정해진 등장인물, 캐릭터성이 확고한 게임 속 인물의 서사에 초점을 맞춘다면 ‘크레토스의’를 사용할 수 있겠다.


<갓 오브 워(God of War, 2018. You나 Player라는 말 대신 크레토스라는 등장인물의 이름을 활용했다.>


필자 개인적으로 느낀 바에 따르면(특히 한-영 로컬라이제이션 작업에서), 가장 무난한 선택지는 역시 You다. 플레이어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데도 탁월하며 몰입을 유도하기에도 쉽다. 오늘날 대부분의 게임에서는 기본적으로 커스터마이징 기능을 지원하는데, 다시 말해 정해진 주인공이 없기 때문에(있더라도 기초적인 배경만을 제공하기 때문에 결국 그 캐릭터의 ‘안’에 있는 것은 플레이어다. 어차피 이름 또한 자리 표시자Placeholder 안에 표시될 것이고.) 앞서 말한 이유와 명확성을 위해서라도 You, 2인칭 대명사는 적합하다고 볼 수 있겠다. 간결한데다 인칭, 성별(영어의 경우 해당하지는 않지만)에 따른 문법적 차이에서 한숨 돌릴 수도 있다. 뭐, 어쨌든 가장 중요한 것은 맥락이기에 게임에 가장 적합한 호칭을 찾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지만.

잘 알지도 못하는 언어학 개론을 길게 쓴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게임이라는 세계로 모험을 떠나는 당신이, 등장인물과 어떤 관계를 맺을지를 결정하는 데 있어 사소해 보이는 대명사가 열쇠 역할을 하기도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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