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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날의 역사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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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mediumsung   벵거는 아스날을 잉글랜드 최고 명문 클럽 중 하나로 만들었고 누구보다 팀을 사랑했지만 팀을 위해 떠나야 할 시기는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소수의 목소리였던 Wenger Out은 어느새 대다수 팬들의 외침이 되었고 그나마 아스날과 벵거가 내세울 수 있는 건 FA 컵 최다 우승 뿐이었다.   16/17 시즌 FA 컵 우승을 달성했지만 리그 순위는 벵거의 지휘 아래 한 번도 본 적 없던 5위였다. 17/18 시즌에는 거금을 들여 라카제트, 오바메양을 영입했지만 최종 리그 순위는 오히려 한 계단 내려간 6위. 설상가상으로 유로파리그도 4강에서 탈락했고 이에 벵거는 아스날 감독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20년간 팀을 이끈 벵거의 후임이 누가 될 것인가에 대해 많은 이야기가 흘러나왔지만 모두의 예상을 깨고 팀의 지휘봉을 잡은 건 우나이 에메리였다. 에메리는 세비야를 이끌고 유로파리그 3연승이라는 대기록을 달성한 좋은 감독이었지만 세비야보다 규모가 크고 오일 머니로 데려온 슈퍼스타들이 즐비한 파리 생제르망에서는 라커룸 장악에 실패한 감독이었기에 기대와 걱정이 공존했다. 에메리 지휘 아래 아스날은 리그 5위, 유로파리그 준우승에 머물렀고 다시 한 번 챔피언스리그 진출에 실패한다. 그럼에도 벵거 시절에는 볼 수 없었던 빠른 교체, 상대 맞춤 전술 등 어느정도 희망을 볼 수 있었기에 한 시즌 더 팀을 이끌기로 한다. 19/20 시즌에는 이전 시즌에서 장점으로 작용했던 맞춤 전술이 하나도 들어맞지 않고 메인 전술 없이 상대 맞춤 전술을 과도하게 시도하니 선수들이 전술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는 비판에 시달렸고 결국 시즌 도중 경질당한다. 에메리의 후임으로 팀의 지휘봉을 잡은 미켈 아르테타는 결국 8위로 시즌을 마감했지만 감독 커리어가 처음임에도 팀의 좋지 않은 분위기를 수습한 점,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FA 컵 우승을 달성한 점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팬들은 벵거의 제자이자 세계적인 명장 펩 과르디올라 감독 밑에서 코치 생활을 한 아르테

아스날의 역사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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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mediumsung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탈락 이후 팀의 전성기를 이끈 주축 선수들이 다양한 이유로 팀을 떠나고 아스날은 젊고 유망한 선수들 위주의 팀으로 개편된다. 떠난 선수들과 비슷한 나이, 수준의 선수들을 데려오지 못하고 아직 다른 팀이 발견하지 못한 젊은 선수들을 찾아 선점하는 방식으로 팀을 꾸리게 된 이유는 새로운 구장 때문이었다. 유럽 구단들은 경기 당일 입장권 수입이 구단 수익에서 매우 많은 비용을 차지한다. 때문에 4만 명도 수용하지 못하는 오래된 구장 하이버리에서는 팀을 더욱 발전시킬 수 없다 생각한 보드진과 벵거는 4억 파운드 가량을 들여 새 구장 에미레이트 스타디움(애쉬버튼 그로브)를 짓는다. 2000년대 들어 러시아 부호 로만 아브라모비치는 런던의 그저 그런 팀 첼시를 인수해 막대한 돈을 쏟아붇는데 이 시기를 기점으로 구단주가 막대한 돈을 투자해 팀을 우승시키는 일이 발생한다. 당연히 선수들의 이적료와 주급은 폭등했고 경기장 건설로 인한 부채를 떠안은 아스날은 이러한 시류에 편승하지 못한다.  벵거는 두 가지 방법을 사용해 이를 극복하고자 했다. 아직 다른 구단이 발견하지 못한 잠재력이 뛰어난 어린 선수들을 영입해 육성하는 것, 아스날에 충성스러운 잉글랜드 선수들을 위주로 팀을 꾸리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다양한 잉글랜드 출신 아스날 선수들이 배출됐으나 결과적으로 이 정책은 실패로 끝난다. 07-08 시즌에는 세스크 파브레가스가 주축이 돼 팀을 구성, 로시츠키 – 파브레가스 – 플라미니 – 흘렙으로 중원을 구성하는 세스갱 라인을 구축했으나 리그 3위로 우승에 실패했고 흘렙은 바르셀로나로 떠난다. 로시츠키는 경기에 나올 때마다 경기 템포를 바꾸는 뛰어난 선수였지만 항상 부상에 시달려 경기를 뛰는 날보다 부상으로 나오지 못하는 날이 많았고 팀의 주축이자 벵거의 양아들로 불리던 주장 파브레가스도 자신의 고향 바르셀로나로 떠난다.   11-12 시즌 항상 부상으로 경기에 별로 나오지도 못하면서 벵거의 총애를 받아 팀에 남아있던

아스날의 역사 4 - Arsene Who & The Invinci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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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mediumsung 아르센 벵거 부임 팬들과 언론의 반응은 매우 회의적이었다. 당시 잉글랜드는 지금과 달리 외국인 감독이 거의 없었고 선수들조차 외국인 감독에 대해 잘 몰랐기 때문이다. 물론 벵거는 모나코에서 감독으로서 재능을 인정 받은 감독이었지만 잉글랜드 인들에게는 그저 일본에서 감독을 하다 온 프랑스 인일 뿐이었다. 그러나 벵거는 자신의 철학을 바탕으로 아스날을 전혀 다른 팀으로 바꾸는 데 성공한다. 매일 경기가 끝난 후 술과 담배를 하고 패스트푸드를 입에 달고 다니던 선수들의 습관과 식단 체계를 관리했으며 당시 잉글랜드에는 없었던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훈련 시스템을 도입했다. 벵거의 훈련 시스템과 선수 식습관 관리는 이후 모든 구단이 따라하는 등 잉글랜드 축구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당시 잉글랜드 구단의 감독들은 선수들에게 알아서 훈련을 하라는 식으로 훈련이라고 말하기도 민망한 훈련 지시를 내렸다. 벵거는 선수들에게 날마다 다른 훈련을 구체적으로 지시했고 스톱 워치, 마네킹을 이용한 전술, 패스 훈련, 근육 스트레칭, 프라이오메트릭 기법, 요가를 도입했다. 철의 포백 중 한 명인 스티브 보울드는 선수 시절 했던 요가로 자신의 커리어가 2년 늘어났다고 회상하기도 했으며, 미스터 아스날이자 잉글랜드 역대 최고 센터백 중 한 명인 토니 아담스는 지독한 알코올 중독이었으나 벵거 덕에 아스날에서 23년 간 504경기를 출장할 수 있었다. 전술적으로도 벵거는 잉글랜드에서는 볼 수 없었던 축구를 구사했다. 조지 그레이엄 시절의 아스날이 그랬듯 잉글랜드 구단들은 대부분 히트 앤 런, 뻥 축구를 구사했는데 벵거는 빠른 패스와 스위칭 플레이를 바탕으로 하는 패스 축구를 시도했고 이는 잉글랜드 리그에 파란을 불러 일으켰다.  당시 팀의 코어 라인인 데니스 베르캄프, 패트릭 비에이라, 토니 아담스의 활약에 힘입어 벵거 부임 1년 만에 아스날은 리그 우승과 FA컵 우승을 따내며 더블을 달성한다. 그러나 당시 잉글랜드 리그의 절대 강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밀

아스날(Arsenal)의 역사 – 창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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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mediumsung 런던을 연고지로 하는 빅 클럽 아스날은 런던 남동부에 있는 울위치의 왕립 무기고(Royal Arsenal, 로열 아스날)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이 모여 만든 것으로 1886년에 다이얼 스퀘어(Dial Square)라는 이름으로 창단됐다. 1893년에는 클럽의 이름을 울위치 아스날(Woolwich Arsenal)로 변경한 뒤 풋볼 리그에 참가한다.  울위치 아스날의 연고지였던 울위치 지역은 지리적으로 고립돼 있어 관중 수익이 나지 않았다.  현재도 입장권 수익이 구단 수입에서 꽤 많은 비중을 차지하지만 20세기 초는 입장권 수익 구단 수입의 거의 전부였기에 울위치 아스날은 파산을 피하고자 연고 이전을 선택한다. 아스날은 연고지를 남부 울위치의 매너 그라운드에서 북런던의 하이버리로 옮겼다. 이사한 아스날 홈 스타디움은 당시 미들섹스에 위치한 토트넘의 화이트 레인에서 불과 4마일(약 6.4km) 정도 떨어진 장소이다. 그리고 이듬해 울위치를 빼 버리고 현재의 아스날 FC로 구단 명을 변경했다. 아스널이 하이버리로 이전한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14년부터 1918년까지의 기간은 세계적으로는 1차 세계대전이 있었고, 잉글랜드의 축구 역사 중에서도 가장 혼란스러웠던 시기이다. 1차 세계대전의 영향으로 잉글랜드 풋볼리그가 중단됐던 1915년에는 맨유와 리버풀의 승부조작 사건이 터졌고, 4년간의 전쟁이 끝난 후 1919년 리그가 재개되기 직전에는 노리스 구단주의 주도면밀한 계획 아래 아스널과 토트넘이 연루된 또 하나의 커다란 스캔들이 터진다. 1914/15시즌, 1부 리그에서 최하위를 기록한 두 팀은 첼시(19위)와 토트넘(20위)이었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 이후 리그가 속개되면서 리그 측에서 참가팀을 20팀에서 22개팀으로 늘렸기 때문에, 두 팀은 그대로 1부리그에 남고 2부 리그에서 2팀이 승격하는 것이 상식적인 처사였다. 바로 그런 상황속에서 같은 시즌 2부 리그 5위를 기록해 정상적인 승격이 어려웠던 아스널의 노리스 구단주는 비